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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기리면3
제목 숭례문을 기리면3
작성자 사랑이 (ip:210.97.177.128)
  • 작성일 2008-03-04 06:4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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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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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돋보기답사]숭례문현판 왜 「세로쓰기」일까


우리 도성(都城)의 성문이나 궁궐의 문, 그밖의 각종 건축물엔 그 의미와 유래를 담은 현판이 걸려 있다.

현판은 보통 가로쓰기에 3자 내외. 그런데 국보1호인 숭례문(崇禮門·남대문) 현판은 왜 세로로 쓰여 있을까. 보물1호인 흥인문(興仁門·동대문)은 왜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글자 수를 늘리고 두 자씩 두 줄로 써넣었을까.

숭례문의 경우 불의 산(火山)이라 일컬어지는 한양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였다.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 숭례문 현판은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그래서인지 서체가 장중하면서도 단아하다.

임진왜란 때엔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다. 몇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흥인문 현판이 특이한 모양을 취한 것은 어인 까닭일까. 흥인문이 위치한 곳은 땅이 낮고 지세가 약해 현판의 글자 수와 행을 늘려 땅을 높이고 지세를 보완하려는 뜻이었다.

다음은 대한문(大漢門) 이야기. 대한문은 원래 대안문(大安門)이었다. 현판 이름을 고친 것은 1906년경. 안(安)자에 계집녀(女)가 들어가 있어 좋지 않다는 당시의 인습 탓이었다. 또 고종이 ‘대한문으로 고쳐야 국운이 창성한다’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란 말도 있다.

대한문은 현재 덕수궁의 정문 행세를 하고 있지만 실은 정문이 아니다. 이같은 사실은 이름에서 금방 드러난다. 모든 궁궐의 정문은 화(化)자 돌림. 경복궁의 광화문(光化門), 창덕궁의 돈화문(敦化門), 창경궁의 홍화문(弘化門), 경희궁의 흥화문(興化門)이 그러하다.

덕수궁의 원래 정문은 남쪽에 있던 인화문(仁化門). 일제시대때 그곳에 건물이 들어서고 길이 나면서 정문은 사라졌고 지금은 덕수궁 돌담길만 남아 있다.

경복궁의 광화문 현판은 한글.68년 복원 당시 박정희대통령이 쓴 것이다. 한자를 한글로 바꾼 것에 관해선 찬성도 있지만 ‘원형 유지’라는 문화재 보존 원칙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본래의 한자 현판은 6·25때 불에 타 없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현판은 삼국시대부터 등장한다. 현존 최고(最古)의 현판은 신라 명필 김생이 썼다고 하는 충남 공주 마곡사의 대웅보전(大雄寶殿). 물론 그 진위는 불확실하다. 이를 제외하면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과 경북 안동군청 청사에 걸려있는 안동웅부(安東雄府)의 현판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모두 고려말 공민왕의 글씨.

〈이광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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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녕이 현판 썼다는데 과연 그럴까?

 

 

» 국립박물관 보존과학실 직원이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화재 진화 중 떨어져 부서진 숭례문 현판을 살펴보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지난 10일 밤 화재로 숭례문 누각이 소실된 가운데, 현판이 새삼 시민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불기둥이 치솟는 상황에서 소방관이 현판을 가까스로 떼어내는 장면이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되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현판 글씨를 쓴 인물로 조선조 태종의 맏아들인 양녕대군(1394∼1462)을 지목했다. 문화재청과 서울시 누리집 등에 소개된 내용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숭례문 현판 글씨의 ‘원작자’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조선후기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을 보면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그(양녕대군)가 쓴 글씨”라는 구절이 있어 통설을 뒷받침하고 있다. 하지만 추사 김정희는 <완당 전집>에서 “지금 숭례문 편액은 곧 신장의 글씨”라고 적어 놓아 이긍익의 주장과 다르다. 신장(1382∼1433)은 대제학을 지냈으며 초서와 예서에 능했던 사람이다. 역시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숭례문이라는 이름은 삼봉 정도전이 지은 것이요, 그 액자는 세상에서 전하기를 양녕대군의 글씨라 한다”면서도 “숭례문의 편액은 정난종이 쓴 것”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근거로 “(정난종은) 세조 때 사람으로 비석이나 종에 글을 새기도록 임금의 명을 많이 받았다”며 “글씨체로 보아도 그의 것임이 분명하다”고 밝혔다. 또한 이 글에는 임진왜란 때 현판이 일본인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수습된 뒤에 다시 걸렸는데, 이는 좋은 글씨가 땅에 묻히면 괴이한 빛이 나기 때문이라는 일화도 소개돼 있다. 정난종(1433∼1489)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서예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 잡지인 <별건곤> 1929년 9월치에는 ‘안평대군의 글씨는 오해요, 중종시대 명필 유진동의 글씨’라는 기록도 보인다.

이처럼 옛 기록의 서술들이 서로 엇갈려 현판 글씨의 ‘주인’을 가려내기가 쉽지 않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사학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암 문일평(1888∼1939)은 1935년 한 일간지에, 현판 글씨를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게 매우 어려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연합뉴스: 전진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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