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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을 기리면2
제목 숭례문을 기리면2
작성자 사랑이 (ip:210.97.177.128)
  • 작성일 2008-03-04 06:38:34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3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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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호 남대문 그 영광과 비애

 

 

 

국보 1호.

지정번호가 문화재 가치 등급을 의미하지는 않지만 국보 1호는 분명 영광된 자리다.

2005년 11월8일 현재 대한민국 국보는 모두 307건이 지정돼 있다. 남대문을 필두로 2005년 9월28일 308호로 등재된 전남 해남 대흥사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에 이르기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들이 '국보'라는 이름 아래 일렬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국보 1호 숭례문, 즉 남대문은 영광을 누리기보다는 '타이틀 박탈'이라는 위협에 줄곧 시달려왔다.

그 주된 이유는 대한민국 국보 1호라는 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국보 1호의 자격이 있는가"라는 의문이 항상 남대문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다.

이따름 터지는 국보 1호 교체 논란과 관련, 수차례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 남대문은 상위권에 들지 못했다. 이런 여론조사에서 부동의 수위는 늘 훈민정음이었고, 경주 석굴암과 해인사 팔만대장경이 그 뒤를 바짝 추격하는 양상을 보여왔다.

사실 이들 문화유산에 비해 적어도 '덩치'에서는 밀릴 것이 없었지만 남대문은 초라한 대접을 받기 일쑤였다. '나이' 순으로 보면 훈민정음과 거의 동시대이긴 하지만, 이미 1천200살이 지난 석굴암은 물론이고 700살을 훨씬 넘긴 팔만대장경에 비해서도 '애송이'에 지나지 않는다.

게다가 남대문에는 일제 식민잔재라는 그림자가 늘 어른거리고 있다. 남대문은 식민지시대 조선총독부에 의해 조선 고적 제1호로 지정됐다. 이런 지정 번호는 1960년대 초반 대한민국 정부가 문화재보호법을 제정 시행하게 되면서 대한민국 국보로 고스란히 편입되기에 이른다. 지정 명칭, 순서 또한 식민지시대 고적 순서와 차이가 없다.

 

 

 

이런 '어두운 과거'는 마치 남대문 자체가 지금은 없애버려야 할 '식민잔재'로 오인받게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남대문은 조선왕조 개창과 더불어 서울성곽의 4대문 중에서도 당당한 대문이요 정문이었고, 당시 조선건축술의 총화임에 틀림없음에도 그 자체가 마치 식민잔재인양 치부되기에 이르렀다.

이와 같은 '오명'은 명칭 논란까지 가세함으로써 더욱 가속화했다.

일반에 익숙한 남대문은 본래 명칭이 '숭례문'인데, 일제가 숭례문이란 이름을 버리고 고의로 남대문으로 바꿨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심지어 역사학자나 정부기관 책임자 중에서도 그런 주장을 일삼기도 한다.

남대문은 이미 조선 태조 창건 당시에도 숭례문이라는 정식 명칭과 더불어 남대문이라 일컬어졌으며 그 후에도 줄곧 남대문이라 불렸다. 무슨 뜻인지 알기도 힘든 숭례문에 비해 남대문이 훨씬 친숙하며 그 의미 또한 명료했을 것임은 불문가지다.

남대문은 명칭 문제나 식민잔재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면서 1996년에는 국보 1호 라는 타이틀의 박탈 직전까지 몰리기도 했다.

국보 1호를 남대문이 아니라 대한민국이 세계에 자랑할 수 있는 훈민정음으로 바꿔야 한다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고, 그에 맞춰 문화재관리국(지금의 문화재청)이 국보 교체 안건을 문화재위원회 심의에 부쳤던 것.

남대문은 이 위기를 용케도 버텨냈다. 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었다. 이 위기를 넘긴 남대문은 2003년에 또다시 위기에 봉착했다.

남대문이 한일합방 직전에 교통 장애 등을 유발한다는 이유로 헐릴 뻔했으나,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1562-1611)가 이끄는 왜군이 조선 왕궁으로 입성한 문이라 해서 보존됐다는 견해가 나왔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당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일제시대 조선총독부의 조선 성곽 정책을 연구해 석사학위를 받은 오타 히데하루 일본 도호쿠대 특별연 구원이 서울대 국사학과 기관지 '한국사론' 49집에 발표한 논문에서 제기됐다.

논문 '근대 한일 양국의 성곽 인식과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 정책'에서 오타 연구원은 1904년 9월 이후 1908년 11월까지 조선군사령관으로 근무한 하세가와 요시미치(.1850-1924)가 교통 장애를 이유로 남대문을 헐어버리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런 움직임은 요미우리신문 편집장 주필을 거쳐 당시 한성신보 사장 겸 일본인거류민단장이었던 나카이 기타로(.1864-1924)에 의해 제동이 걸렸다. 오타 연구원에 의하면 나카이 사장은 "(남대문은) 가토 기요마사가 빠져나간 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건축물은 남대문 외에 두 세 개밖에 없다. 파괴하는 것은 아깝지 않은가"라고 설득했으며 이를 하세가와 사령관이 받아들임으로써 보존됐다.

돌이켜 보면 국보 1호라는 타이틀을 거머쥠으로써 남대문은 큰 상처를 입어왔다. 훈민정음이나 석굴암, 팔만대장경에 비해 뒤질 것 없는 남대문이지만 다시금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논란이 일기 시작했고 전반적인 사회 흐름으로 보아 이번에는 국보 1호 자리를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서울=연합뉴스 : 김태식기자

 

 

 

첨부파일 20080304063833-002.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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